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 part 1>
난 강북의 한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몇해전 그곳을 다시 가봤을때 산동네는 온데간데 없고 고층아파트가 즐비했다. 유년시절 난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를 들어가고 친구들집에 놀러가면서 푸세식이 아닌 수세식 화장실과 연탄이 아닌 보일러를 때는 집도 있다는걸 알았다.
자괴감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힘겨웠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던 삶이었다. 청소년시절 유일한 낙이었던 음악, 학교음악시간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어느 음악수업시간, 선생님은 클래식 음반을 오디오에 넣고 잠시 나갔다 올테니 듣고 있으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난 오디오에서 클래식 음반을 빼고 라디오에서 녹음했던 디페쉬 모드의 'just can't get enough'를 틀었다. 애들은 신나서 당시 유행했던 패션춤과 토끼춤,이재민의 로보트춤을 췄고 춤을 싫어했던 나도 앞에 나와 흥에 겨워 이안 커티스춤을 추었다. 그때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난 싸대기를 맞아야 했다.
신문에는 항상 찌라시가 붙어온다. 당시 나는 동네 태광대리점 찌라시를 참 좋아했다. 왜냐하면 야마하 키보드 광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는걸로 만족해야했다. 우리집 형편을 잘 알고 있기에. 난 도화지에 키보드그림을 그리고 건반도 그려넣어 그걸로 연주놀이를 하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용돈을 모아 동네 완구점에 가서 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키보드를 샀다. 너무 행복해 연주를 하다 눈물이 났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다 여러 매체를 통해 음악정보를 접하고 음악도 많이 들을수 있는 시대지만 내가 어렸을적 유일한 음악적 욕구의 해방처는 라디오뿐이었다. 전영혁,황인용,김광한등 여러 팝프로그램이 당시는 인기였다. 하지만 그걸로 부족했다. 어느날 주파수를 만지작 거리다 발견한 afkn 이글fm!!!!!!! 흥분 그 자체였다. 뭐라 하는지 알수는 없지만 좋은 팝음악을 쉴새없이 틀어댔다. 그때부터 라디오는 내 친구였고 공부할때도 이어폰을 몰래 끼며 듣다가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유년시절, 청소년 시절은 풍족하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억압된 학교는 날 점점 음울하고 반항적으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어느날 난 평소처럼 등교를 했다. 교문앞에는 엿장수들이나 들고다닐법한 왕가위를 든 체육선생과 교련선생들이 있었따. '아 씨바, 오늘 학교 끝나고 머리 자르려고 했는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해도 늦었다. 선생들은 가차없이 나의 앞머리에 가위를 댔다. 앞머리가 일자가 되었다. 바로 이안 커티스 머리...........
기분이 더러웠다. 분노가 치밀었고 그때 선생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교문앞에서 또 다시 이안 커티스춤을 췄다. 이번에는 싸대기와 함께 발길질이 날라왔다.
그다음날 난 삭발을 했고 한동안 전자음악을 멀리 한채 헤비메탈에 심취했다. 그렇게 학창시절은 분노와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part 2>
그렇게 삭발을 하고 갑자기 헤비메탈에 심취했을때 같은반의 한 녀석이 다가왔다. 바로 '오지석' 이란 녀석이었다.
평소에 그다지 친하진 않았는데 이녀석은 아마추어 메탈밴드의 드러머였다. 밴드이름도 거창했다. '메탈갓스(metalgods)'
그런데 그녀석은 항상 'U2'가 새겨진 검은 티셔츠를 입고 다녀서 난 그 이후까지도 U2가 메탈밴드인줄 알았다.
오지석은 마사루가 '원츄'하듯이 말끝마다 '크레이제~' 하는 버릇이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내게 와서 메탈의 역사를 설명했고 자신의 밴드공연 티켓을 강매했다.
그녀석 앞에서 감히 예전에 내가 전자음악을 좋아했다고 말할순 없었다.
웬지 메탈에 빠지고 그녀석과 놀면서 난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졸업, 결국 난 재수를 했고 어영부영 지방소재 캠퍼스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활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전공도 적성에 맞지 않았고 오티도 안간지라 아는 얼굴도 없었다. 그렇게 아웃사이더로 떠돌무렵 한 녀석이 다가왔다. 나와 같은과라며 자기는 드럼을 친다고 얘기했고 내 후줄근하고 지저분한 겉모습을 보고 너도 음악 좋아하는거 같다며 친한척을 했다.
그녀석에 이끌려 학교 락동아리 오디션에 얼떨결에 참가했다. 오디션은 뻔했다. 무슨 메빠들의 향연장 같았다. 보컬지원자들은 거의 'she's gone' 같은걸 불렀고 기타연주도 잉베이연주를 늘어진 테이프로 듣는것같은 연주를 해댔다. 락동아리회장이 내게 "넌 어느 파트에 지원했냐?" 고 물었을때 난 "연주와 함께 노래를 하겠습니다"하고 얼버무렸다. 드디어 내 차례, 하지만 다룰줄 아는 악기라곤 장난감 키보드밖엔 없었다. 그래서 난 학교도서관 공사현장에서 쇠파이프를, 학교식당에서는 양은냄비를 빌렸다. 양은냄비를 함께간 드러머 친구머리에 씌운뒤 쇠파이프로 존나게 내리치며 스로빙 그리슬의 'discipline' 을 열창했다. 노래는 1분도 못하고 락동아리회장이 내게 기타를 집어던지며 꺼지라고 했다. 같이 갔던 친구또한 오디션도 못보고 쫒겨났다. 또다시 왕따가 되었다.
그때이후로 종교같던 메탈을 벗어던졌다. 대학도 부모님 몰래 관두고 집을 나와서 청계천을 떠돌았다. 그리고 낙원상가의 한 악기점에서 알바를 시작하며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part 3>
낙원상가....그렇다. 한국 악기의 메카. 한국에서 음악에 종사하는 자들이라면 한번은 가봤을곳. 그곳에서 내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주인아저씨는 젊었을적 미8군에서 오르간주자를 하시다가 음악을 접고 이곳에 터를 잡으신 분이었다.
무엇보다도 항상 찌라시사진으로만 보던 악기들을 내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본다는건 정말 꿈만 같았다. 꿈에도 그리던 키보드며 기타, 드럼, 그리고 여러 장비들. 난 주인아저씨명에 의해 그것들의 특징과 매뉴얼등에 대해 빠삭히 공부해야 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성실함은 종로일대에 퍼져 맞은편 세운상가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왔다. 낙원상가 아저씨에겐 미안했지만 시급으로 500원을 더주겠다는 세운상가 아저씨의 말에 결국 난 세운상가로 옮겨야 했다. 세운상가에선 포르노 비디오와 워크맨을 파는 일을 했다.
어느날 ABC 농구대회 준결승전 한국 대 일본전을 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내게 "상묵아, 저거 녹화떠놔라" 그러시는 것이었다. 난 속으로 사장님이 농구 좋아하시나보다 생각하고 무심코 녹화를 떳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 농구테이프를 다른 복사기들에 넣어 수십개의 테이프로 복제했다. 그렇다. 포르노비디오를 사러오는 고삐리애들에게 농구테이프를 팔며 사기를 치는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테이프를 사 꿈에 부풀어 집에 가서는 허재의 3점슛만 주구장창 봐야했던 것이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워크맨을 수리하러 오는 애들에게 몇천원짜리 부품을 몇만원으로 부풀려 팔곤 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갈데라곤 없어서 청계천 주변을 떠돌았다. 황학동 근처에서 배회하던중 한 음반가게에서 '점원모집'이라는 구인광고를 보았다.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더니....
열심히 일했다. 낙원상가에서 악기와 장비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했다면 황학동에선 수많은 음반을 통해 여러 뮤지션들에 대해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음반의 유통과정등에 대해서도. 낮에 부지런히 일하고 밤에는 청계천 쪽방에서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들으며 매일 음악신청엽서를 보냈다. 월요일은 탠저린 드림, 크라프트베르크, 화요일은 조이 디비전 수요일은 뉴오더, 디페쉬 모드 목요일은 큐어.....이런식으로.
전영혁씨가 나의 정성에 감복했는지 편지를 보내 날 라디오에 초청했다. 일일DJ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하는 영광을 얻었다. 너무나 기뻤고 바로 그게 내 인생에서 빼놓을수 없는 변기똥, 계중식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될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part 4>
떨리는 목소리로 일일DJ를 한후 전영혁씨는 내게 마지막 인사멘트를 하라고 했다. 난 우리 음반가게 홍보도 할겸 해서 "네, 청취자 여러분들 감사드리고요, 아 제가 크라우트락,일렉트로닉,고딕,인더스트리얼등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뭐 모임같은걸 만들고자 하오니 관심있는 분은 제가 일하는 청계천 새한레코드 02-023-3092로 전화주세요." 라고 끝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두통의 전화가 왔다. 방송을 들었다며 자신들도 그런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는 가게가 쉬는 수요일날 명동 봉다방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
봉다방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도중 괴상한 남자가 들어왔다.
변기똥....그의 첫인상은 지금도 도저히 잊을수가 없다. 바가지를 씌운채 자른듯한 일자앞머리, 군바리들이 입는 목늘어난 국방색 난닝구, 바지줄을 칼같이 세워 배위까지 걸쳐입은 검은색 기지바지, 흰색 byc양말에 동네 신발가게에서 샀을 앞에 구멍이 솔솔 나 있으며 방울 두개가 달린 구두, 그리고 버스기사들이 주로 쓰는 커다란 녹색 선글라스.
다방안 사람들은 그를 보고 모두 키득댔다. 난 그냥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대뜸 내자리로 와서 "계상묵씨죠? 전 변기똥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변기동인데 출생신고할때 저희 아버지 발음이 좀 세셔서 똥으로 등재되는 바람에 이름이 그래요." 하더니 날계란 동동 띄운 쌍화차를 주문했다.
30분이 지났을까? 귀티나는 청년이 또 한명 등장했다. 바로 계중식.....
계중식은 기똥이하고 나와 달리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른바 강남개발로 덕을 본 졸부였다. 그는 주차할곳을 찾느라고 늦었다며 미안해했다. 계중식은 졸부의 아들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겸손했고 교양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셋은 처음 만나 일렉트로닉 음악에 대해 침을 튀며 얘기했다. 그후로도 일주일에 한번씩 모임을 가져 음악다방등을 돌아다니며 우리가 가져온 일렉트로닉 LP를 DJ에게 부탁해 듣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몰래 가게 LP를 빼돌린다고 생각한 주인아저씨의 오해에 의해 난 그만 해고당하고 말았다. 앞이 막막했다. 변기똥과 계중식을 만나 소주를 마셨다. 그때 계중식이 자기 아버지 친구가 무교동 엠파이어 클럽 사장이라며 거기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약속했다. 너무 고마웠다. 눈물이 나서 계중식을 껴안았다. 그런 감동적인 순간에도 변기똥은 술에 취해 옆자리 여자손님에게 치근덕대다가 그 일행 남자들한테 존나게 얻어맞고 있었다.
무교동시절은 여러모로 내 인생을 바꿔놨다. 본격적인 음악인생의 교두보였으며 무엇보다 나의 사랑하는 여신같은 아내 최신나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계상묵 자서전 electro man part 5>
클럽에서 일하기 위해선 외모도 깔끔해야 했다. 그때부터 세수는 하루에 한번씩 꼭 했고 헤어스타일도 지금까지 유지하는 내 트레이드 마크인 7대3 정교한 가리마에 포마드로 정리한 단정한 스타일을 유지했다.
옷도 깔끔한 웨이터복을 맞추고 나비넥타이까지 매니 나도 꽤 괜찮아 보였다. 마치 자비스 코커 같아 흐뭇했다.
처음 맡은일은 애기 웨이터, 말이 웨이터지 내 사수인 선배 웨이터 '조용필' 형님의 시다바리였다. 을지로, 종로, 명동일대 회사를 돌아다니며 찌라시와 라이터를 돌렸다.
클럽 기도셨던 무교동 백곰 형님과 내 사수인 '조용필' 형님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탓에 웨이터생활이 회의가 들때쯤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우리 클럽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맹진아 누님의 백댄서 하나가 펑크를 내서 내가 백댄서로 땜빵하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맹진아누님의 열창에다 뿅뿅거리는 캬바레 사운드, 현란한 조명에 빠진 탓인지 나는 그만 또 이안 커티스의 춤을 춰버리고 말았다. 무대로 맥주병과 바나나껍질, 심지어 파인애플까지 날라왔다.
그 사건 이후 지배인님과 선배들한테 탈의실에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쫒겨날 처지에 있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클럽 전속악단 '황천보 전자악단'의 리더 황천보 선생님. 선생님은 내가 전에 악기좀 다뤘다는 얘길 들으시고는 나에게 오르간 연주를 해보라고 했다. 그 뒤로 선생님의 혹독한 훈련으로 나는 결국 황천보 전자악단의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색스폰을 부시는 황천보 선생님, 선생님은 다루는 악기가 수십가지가 넘는 천재셨다.
내 자리를 찾은 탓인지 몸은 고되도 그때부터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를 만났다.
'최신나' 여신같은 나의 사랑스런 아내. 무교동, 북창동 일대에서 숙희라고 불리워졌던 그녀는 그곳에서 제일 잘나가는 이른바 '나가요'였다. 그녀에겐 아픈 사연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다니던 여대를 관두고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겐 왠지 모를 슬픔과 지적인 면이 얼굴에 묻어났다.
아침에 항상 퇴근하면 비슷한 시간에 퇴근하는 그녀와 마주쳤는데 난 그때마다 변기똥의 가게(당시 변기똥은 낮에는 명동에서 테이프 장사, 새벽에는 무교동에서 오뎅과 붕어빵 장사를 하고 있었다.)에서 오뎅과 붕어빵을 사서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는 부끄러워 도망치곤 했다. 어느날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쥐어주고 도망쳤는데 그녀가 날 잡고는 말했다. "왜 이러시죠? 부담스러워요" 그때 난 변기똥이 조언해준 그대로 대사를 했다. "이렇게 하면 널 가질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그녀는 감동했는지 오뎅과 붕어빵을 떨어뜨리고 날 와락 안은채 눈물을 흘렸다.
그 뒤로 우리는 굴레방다리 반지하방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녀는 업소를 관두고 야쿠르트 아줌마로 나섰고 나도 황천보선생님과 함께 클럽을 관두고 선생님과 함께 한국 캬바레 사운드의 메카인 대방동 성음스튜디오에서 현철과 벌떼들 데뷔앨범, 고속버스 캬바레 사운드 시리즈를 제작하며 본격적인 엔지니어및 세션맨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생각하면 그때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돈을 벌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뒤늦게 입대영장이 나와 있었고 소중한 일과 사랑스런 마누라를 뒤로 한채 파란만장한 군바리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part 6>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던 한 여름, 306 보충대로 아내와 함께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입대시간, 아내는 그 수정같은 눈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인간은 닥친 환경에 누구나 적응하는법, 아내와 뜨거운 포옹을 한후 당당하게 걸어들어갔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친후 나는 수방사로 차출되었다. 아무래도 청와대를 지키는 경비부대였던만큼 군기가 엄청 셌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 같은걸 상당히 중요시했다. 그래서 전방보다 정신적으로는 더 피곤했던거 같다.
소대에 배치받은 첫날 신고식을 해야했다. 춤과 노래....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난 이것을 엄청 싫어했다. 이안 커티스춤을 많이 췄으나 그건 춤이라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자신에 내재된 분노와 광기를 표출하는 몸부림과 같았다. 목소리가 너무 저음이라 당시엔 노래도 부르기 싫었다. 물론 이후 EBL 활동시 내 중저음 보컬이 이안 해리스경에 의해 '모리시 이후 최고로 드라마틱한 목소리'라고 찬사받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dead soul'을 부르며 이안 커티스의 춤을 췄다. "someone take these dreams away....악!!!!"
시작한지 5초도 안되어 야삽과 반합, 속 꽉찬 베게가 얼굴을 향해 날라왔다. 당시 소대 최고의 악질무식 강병장은 "야 이 xx야, 춤은 좋은데 왜 샹숑을 해, 샹숑을" 이라며 다그쳤고 원산폭격과 철책 매미등 기합이 이어졌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재민의 '골목길'을 이안 커티스춤과 함께 불렀다. 언밸런스 했지만 소대원들이 그제서야 좋아했다. 그뒤로 초소근무를 나갈때나 자고 있을때나 언제나 고참들이 시키면 그 짓을 해야했다. 참고로 이안 커티스춤은 나중에 변형되어 현재 군바리춤의 원형이 되었다는걸 여기서 밝힌다.
날짜가 하루하루 지날수록 군생활에 적응도 됐지만 나의 갈증은 더해갔다. 물론 아내생각과 함께 성에 대한 갈증도 컸지만 음악에 대한 갈증이었다. 음악이라곤 최신가요 짬뽕테이프가 다였기에 목마름이 컸다. 짬밥이 없어 책도 신문도 못읽어 내무반에 있을땐 멍하니 벽만 바라보거나 침상바닥만 문지르고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20시 30분 점호준비시간, 딩시 난 침상닦기에서 막 벗어나 전투화닦기를 담당했다. 전투화를 열심히 닦는 도중 TV 음악프로그램에서 한 락밴드의 공연을 해줬다. 닦는걸 멈추고 멍하니 TV를 보다가 고참한테 들켜 보일러실로 끌려가 불이 꺼진 상태에서 개맞듯이 맞았다. 그뿐인가? 신문으로 관물지를 접다가 멈추고 음악관련 기사를 멍하니 보다가 또 고참한테 들켜 다시 보일러실로 끌려갔다. 어두워서 어디서 주먹과 발이 날아오는지 알 길이 없어 공포는 더했다. EBL곡중 내가 작곡한 'the dark boiler room'은 이때의 경험으로 만들어진것이다.
x같았다. 화장실에서 몰래 빵을 쳐먹으며 눈물을 흘렸다. 쫄따구는 침상에 엉덩이 대고 전투화도 못신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누가 노크하면 x누다가다도 "이병 계상묵입니다!" 하고 관등성명을 대야했다. 물론 지금 학생들이나 군바리들에겐 먼 과거의 얘기일것이다. 지금이야 선생이 때리면 112에 신고하고 고참이 욕하면 소원수리하면 그만이지만 그시절엔 꿈도 못꾸었다.
고참이 되면 내가 다 바꾼다 다짐했으나 '본전생각'이라는게 그때 무엇인지 알았다. 난 고참이 되었을때 경비중대보다 훨씬 '빠진' 본부중대로 전출되었다. 개판이었다. 병장이고 이병이고 다 자빠져서 비디오를 보질 않나, 고참을 봐도 대충 경례를 하고 뭘 시키면 "왜 그러십니까?"하며 되물었다. 뭐가 옳은건지 나도 헷갈렸다.
시간은 흐르고 여자를 접할 기회가 없자 나의 성 정체성도 혼란스러워졌다. 지휘통제실에서 근육질에 검은 피부를 가진 쫄다구와 상황 근무를 서다 야릇한 상상을 하게 되었고 꽃미남 신병이 들어왔을때 내 옆에서 자면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아오이라던가 그런건 당시만 해도 아니었다. 영창갈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자신이 혼란스러웠을뿐 그게 현재 양성애자로 발전할줄은 몰랐다.
그렇게 군생활은 어느덧 끝나고 난 개구리 마크를 달고 부대정문을 나섰다. 예전엔 그렇게 제대날짜만 손꼽았는데 막상 나오니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감정이 묘했다.
제대후 일주일은 아내와 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완전히 존 레논과 오노 요꼬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래가 막막했다. 백수로 지내는 날이 길어지자 아내에게 미안했다. 다시 한번 계중식(계중식은 아버지가 병무청에 돈을 뿌려 군면제를 받은 상태였고 변기똥은 이때 강원도 양구에서 군악대생활을 하며 매일 외출해 다방레지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 이번에는 강남룸살롱의 밴드마스터였다. 일하면서 못볼것도 많이 봤고 세상이 이렇게 추접한가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술취한 손님들에게 연주를 못한다며 양주병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고 기타를 뺐어 날 내리치질 않나 앰프로 날 집어던지질 않나 완전히 룸은 나인 인치 네일스의 공연장같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꾹 참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게 나의 삶인가 회의가 들었고 결국 내 인생에 광명과 파멸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독일 유학과 영국체류생활이 시작된다......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part 6>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한건 물론 독일이 학비도 거의 안들고 무엇보다 전자음악의 발상지이기 때문이었다. 난 내가 그동안 관여했던 음반들(현철과 벌떼들, 고속버스 캬바레 사운드 시리즈)과 내가 틈틈히 작곡해두었던 오락실 사운드등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보냈다.
그곳 기술대학장 미카엘 하인리히교수는 여지껏 듣지 못한 독특한 사운드라며 나의 입학을 허가했고 난 3년간 장학금을 받고 그곳에서 음향학에 대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아내는 나를 위해 기러기아내가 되어주었다. 그땐 그게 너무 미안했는데 나중에 아내가 한국에 남은 이유가 변기똥때문이란걸 알고는 허탈했다.
홍콩을 거쳐 뮌센국제공항{뮌헨은 잘못된 표현, 뮌센이 정확한 독일발음, 바이에른 뮌헨(x) 바이에른 뮌센(o) o.k??} 에 내리자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우선 그들의 엄청난 떡대와 함께 낯선 동양인에 대한 은근한 비하적 시선등. 하지만 속으로 "나는 자니 뎁이다. 나는 리버 피닉스다. 나는 코쟁이다"하며 이미지트레이닝을 하고 다니니 그런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거울만 안보면 괜찮았다.
살집을 구해야 했다. 기숙사가 다 차서 나는 조그마한 집을 렌트해야했다. 그것이 '그녀' 와 운명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김꽃분이' (본명 김덕출)
그녀는 한국에서 직장을 관두고 요쿠르트 전문점을 차리겠다며 덴마크로 요쿠르트 유학을 떠날려고 하다 비행기를 잘못 타 독일에 내린후 귀찮아서 걍 정착해 부동산 중개인이 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분이와 나의 다정한 한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땅에서 그녀와의 만남과 사랑얘기는 EBL의 'verloren in der Ubersetzung' 이라는 미발표 연주곡에 느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당시 이런 경험등과 감정을 EBL활동당시 케빈 쉴즈에게 술마시며 얘기했는데 그 색기가 아무래도 소피아 코폴라에게 귀뜸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난 'lost in translation' 이라는 영화를 싫어한다.
난 미친듯이 공부했다. 담당교수인 칼 라이지거 교수는 객원교수셨던 크라프트베르크의 플로리안 슈나이더와 함께 혹독하게 날 단련시켰다. 신디사이저의 다양한 음과 효과들에 대해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했고 날 stichhaltiger Meister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심혈을 기울였다. 미세한 음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지를 1시간 마다 팠다. 조용필이 '한오백년'을 부르기 위해 목에서 피를 토했다면 난 귀에서 고름이 나왔다.
이렇게 공부를 하며 난 stichhaltiger Meister가 되어갔지만 아내를 '그'에게 잃게 된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사랑 '분이'가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운명의 장난이자 영화 '원 나잇 스탠드' 와 같은 x같은 경우였다.
그 후 난 뒤셀도르프로 옮겨 플로리안 슈나이더의 지원하에 그곳 인디 일렉트로닉 밴드들의 프로듀서와 사운드 엔지니어 생활도 하고 독일 일렉트로닉 음악 웹진인 'elektro'에서 본격적으로 평론가 생활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독일에서 잘나갔지만 아내 최신나가 그리웠다. 친구들도.
당시 변기똥은 파주의 한 문화센터에서 주부가요교실을 열어 나의 아내를 비롯한 아줌마들에게 신스팝을 가르치다 돈많은 유부녀를 꼬드겨 돈을 뜯은후 뉴욕으로 날라버린 상태였고 계중식은 아버지에게 등떠밀려 캐나다로 유학을 갔으나 공부보다는 한 인터넷 성인방송의 pj생활로 잘나가고 있었다. 변기똥의 첫밴드 선샤인 휘시즈가 콜체스터에서 첫 공연을 할때 변기똥이 썼던 가면은 계중식이 pj활동시 쓰던 것을 기똥이에게 여자 pj들의 팬티며 스타킹과 함께 선물로 줬던 것이었다.
독일에서 잘 나갈무렵 영국에서 온 한 남자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된다. 바로 존경하는 sir 이안 해리스...........
<계상묵 자서전 - electro man part 7>
sir ian harris....일반인들은 데이빗 보위에게 전위적이네 후배 뮤지션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쳤네 얘기 하지만 정작 영국팝계에서 그따위 소리들을 지껄이다간 빠말때기 쳐맞는다.
이안 해리스경은 보위가 특유의 글램 이미지를 만들기 이전부터 글램락의 이미지를 창출해냈고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roxy music의 창립멤버였다(해리스경의 남다른 재능을 시기한 브라이언 페리와 나머지 멤버들에 의해 요즘 유행하는 '탄핵' 되셨다)
그것뿐인가? 해리스경은 또한 고딕문화를 정립하셨고 우리가 흔히 아는 고딕 이미지도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캠든 타운에 가서 고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어보라)
글램락커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안 해리스경.
'고딕의 아버지' 이안 해리스
하지만 그가 후세에 이렇게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못하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일이든 금방 실증을 내고 약물과 알콜중독으로 인해 지속적인 활동을 못한 탓이다.
80년대에 그는 또다시 변신을 하게 되는데 바로 톰 존스와 함께 '컨츄리 락커' 로서의 변신이었다. 그는 톰 존스와 이 시기에 주로 라스베가스 클럽들을 돌며 미국아줌마들에게 지대한 인기를 끌었다.(설운도의 중기이후 음악은 확실히 이 시기 이안 해리스경의 음악에 영향받았음이 틀림없다)
톰 존스가 남진이었다면 이안 해리스는 나훈아였다. 둘은 친구였지만 미국아줌마팬층은 확실히 갈렸다.
그 유명한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라이브, 차차차와 캬바레사운드를 섞은 adult electronic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85년 CMA(country music award)에 참가할때의 모습. 여기서 그는 역대 최다 트로피인 8개를 가져간다.
그는 그후 음악을 접고 NME의 수석 평론가, 대기자로서 최고의 독설가로 날리며 96년 BBC가 선정한 '영국팝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인'에 존 필과 함께 선정되기도 한다.
BBC의 알란 리드는 당시 설명에서 "데이빗 보위는 이안 해리스가 잡은 임팔라를 손쉽게 뺏어먹는 하이에나에 불과하다"고 얘기했다.
그의 이런 업적은 결국 왕실로부터도 인정받아 2000년에 드디어 기사작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위대한 분이 나의 평론들을 보고 직접 독일로 건너와 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워주시겠다고 했을때 난 어안이 벙벙했다.
정신을 차리고 독일생활을 정리하며 그를 따라 도버해협을 건넜다. 내사랑 분이도 버린채....
영국에서의 삶은 독일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익사이팅했다. 영국팝계의 마당발인 그의 소개로 나는 위대한 뮤지션들과 직접 마주보고 인터뷰를 하는등 꿈만같던 일은 계속되었다.
그는 나의 '은인'이자 '정신적 지주'였고 '연인'이었다. 그렇다. 그는 동성애자다. 나 역시 이성애자로서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고 어린시절부터의 동성애적 성향이 그를 만나면서 결국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한 여인을 파국으로 몰고 갈지는 당시 그와의 행복했던 삶에 묻혀 알지 못했다.
분이는 날 잊지 못해 영국으로 건너와 나의 집을 찾았는데 그때 나와 이안 해리스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그녀는 충격에 빠져 레이스 투성이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후 런던시내를 칠렐레~ 팔렐레~ 하며 뛰어다녔다.
죄책감은 들었지만 이안과의 사랑이 난 더 소중했다. 아내 최신나와도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기똥이는 가끔 뉴욕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한인클럽에서 베이스주자로 일하며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사진도 종종 보내왔다. 여전히 일수쟁이가방은 들고 다녔지만 패션은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외로워 보였다. 난 내 경험을 들려주며 힘을 내라고 했고 정 외로우면 영국으로 오라고 얘기했다.
계중식은 아버지에게 pj생활을 들킨후 캐나다에서도 추방당해 당시 행방을 알길이 없었다.
기똥이가 보내온 사진중 하나. 기똥이는 주말만 되면 타임스퀘어에서 이런 차림으로 공연을 한다고 했다.
본격적인 평론가로서의 새 삶에 대만족이었고 난 나만의 웹진을 창간하고 싶었다. 그게 바로 이후에 계중식과 함께 창간한 '탱글라 뮤직'이었다. 기똥이 역시 뉴욕에서 다양한 음악과 문화를 접하고 엄청난 실력을 쌓은 상태였고 난 그에게 영국으로 건너오라고 계속 권유했다.
<독어로 쓴 계상묵씨의 유서 일부>
남겨진 이들에게....
자신이 고독하고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우울증 진단을 내리는 자들 보다 진정한 음울함을 가진 쌈마이 인생들이 나를 더 지지해 줄것이다.
내 삶과 거기에 스쳐갔던 이들과의 모든것들.....
이제는 어린시절 전자음에 놀라고 황홀해했던 그런것들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무대에 설 용기도 정신과 의사에게 내 심리를 말할 그럴 힘조차 없다.
지난 몇달간, 아니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방안에 갇혀 멍하니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난 벙어리가 되어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무기력증과 외부세계와의 단절은 아이러니하게 날 행복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들과의 교감속에서 난 마음 깊숙히 상처를 받았고 점점 그것들이 두려워졌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 되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버려지길 원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삶은 끝내버리는게 낫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속에 맴돌았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자기혐오에도 지쳐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끝없는 망상 혹은 공상과 처절한 기억들이 떠오를때마다 미친듯이 웃어대거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작하고 소리쳤다.
전화벨 소리만 들으면 발작했고 그런 고통속에서도 전화기를 붙잡고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두려움보다는 그 끔찍한 벨소리가 차라리 나았다. 결국 부숴진 전화기에선 더이상 벨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세상속에 내던져진 한마리의 원숭이에서 우리안에 갇힌 돼지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늘 죽고싶은 마음만 있었지 실행할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된것 같다.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까지 자판기에서 음료수 고르듯 고통없는 방식을 택하는 내가 어이없게 느껴졌다.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걸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다. 또한 나 자신 다시 태어난다면 진실하고 아름답게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싶다. 처음 시작할때처럼의 순수함도 잃지 않고.
이젠 감흥이 없다. 음악을 들어도......코미디를 봐도.....슬픈 영화를 봐도......항상 구영탄같은 표정만 지을뿐이다.
나의 글들, 음악들을 사랑해줬던 이들에게 고마울뿐이다. 이젠 예술은 죽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하는 산업만 남았을뿐이다. 그런것들에 이젠 환멸을 느낀다.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 해줬던 친구들....이안 해리스, 변기똥, 계중식........그리고 영원하지 못했던 이제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길 나의 아름다운 여신 최신나, 그리고 늘 나의 카운셀러가 되어줬던 착한 분이.....그리고 내가 존경했던 진정으로 위대한 아티스트들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친아들처럼 끔찍히 사랑했던 아들 동태에게 그래도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선물 Allianz 생명보험을 남긴다.
끝으로 여러분께 나의 소원을 빌자면 내몸을 불살라 대서양에 뿌려줬으면 한다. 바다를 통해 내가 원한 이상향을 찾아 떠나고 싶다......
2004 3. 4 쓰레기같은 인간이..........